(한숨)가난한 사람이 돈을 모을려면 북한처럼 할 수 밖에 없다
홍순명님 얼음집에서 북한핵문제와 기아관련 문제와 관련 외국인들에게 돈을 뜯어내는 광경을 묘사한 글(http://sonnet.egloos.com/4269180)이 올라왔었다.

지나치게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아서 돈을 뜯어내는 모습을 보고서 덧글을 단 분들이 야유를 하였었다.

그런데 북한의 그러한 작태가 과연 온전하게 야유당하고 비난당하여야만 하는 것이었을까?에 대해선 의심이 들고 있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 혹은 국가가 이제 갓 자산 혹은 자본을 축적할려면 북한이 보여주는 "정상적인 상식으로  볼 때는 용납하기가 어려운" 마음으로 행동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즉, 빈자가 부자가 되기 위한 종자돈을 조금이라도 만들려면 북한식 앵벌이의 정신과 맞먹는 각오로 악착같이 한푼두푼 모아야만 간신히 종자돈이 마련된다는 이야기다.

어디 가난한 사람이 종자돈 만들기에만 그러할까. 당장, 자본주의의 역사나 우리나라의 과거만 돌이켜보아도 자산/자본축적의 실제 모습들 중 일부는 북한식 앵벌이라고 야유받아도 할 말이 없을 정도의 모습들로 점철되어 있다.

소작인 혹은 노동자에게서 별별 핑계를 들이밀어서 약속된 것 이상으로 뜯어내기, 탈세, 횡령, 재산은닉, 뇌물공여, 권력과의 유착을 통한 신시장개척 등등, 자본주의의 뒷통수는 얼굴보다 훨씬 추잡하다. 그렇게 추잡하게 돈을 모아서 만들어진 종자돈으로 투자한 것이 성공하여 보다 큰 자본을 형성하여 나간 것이 자본주의 형성의 일면 중 하나인 것이다.

물론, 정직하게 돈을 벌고 저축하여 종자돈을 만드는 가난한 사람/국가도 아주 많다. 그러나 그러한 종자돈을 만들기 위해서 그들은 사소한 인정베풀기조차 하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기에 종자돈을 만들어낸 것이다.


나는 온갖 핑계를 대가며 돈을 뜯어내는 북한의 행태 그 자체를 야유하고 비난하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뜯어내는 돈을 모아서 하는 짓이 경제재건을 통한 국가재건이 아니라 허장성세에다 낭비하는 북한기득권자들의 심리를 야유하고 비난한다.

나는 자신들의 부모님이 바로 북한식 앵벌이와 맞먹는 마음으로 종자돈을 모으고, 그것으로 성장을 거듭하여 지금 자신들이 누리는 풍요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북한의 행태의 일면만을 보고 야유하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by deokbusin | 2009/11/06 09:33 | 푸념, 악담, 그리고 기쁨 | 트랙백 | 덧글(7)
40년 동안 일본의 물가변화추이
출처 : <<写真で見る東京の激変>> 大竹静一郎 著,  ほたるの本  2008년


대촐초임 (시중은행 공통기준)
1960년  15,000엔
1970년  39,000엔
1980년  103,000엔
1990년  161,000엔
2000년  174,000엔
11. 6배 상승.

식빵
1960년  30엔
2000년  170엔
5.7배 상승

가케우동
1960년  30엔
2000년  470엔
15.7배 상승

맥주(큰 병)
1960년  125엔
2000년  330엔
2.6배 상승

목욕탕 입장료
1960년  17엔
2000년  400엔
23.5배 상승

주간지
1960년 30엔
2000년 300엔
10배 상승

야마노테선 운임(1회차)
1960년 10엔
2000년 130엔
13배 상승

택시(2킬로미터 주행)
1960년 70엔
2000년 660엔
9.4배 상승

郵便はがき
1960년 5엔
2000년 50엔
10배 상승



일본의 물가는 대표적 상품을 기준으로 할 경우 40년 동안 평균 11.2375배 가량 상승해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의 물가변화는 어떠할까?


사족 하나 :

인용한 책은 저자가 대학생 시절인 1958년부터 2000년대까지 동경의 중심부와 외곽 몇몇 지역의 변화를 촬영한 것이다.
가령 토쿄 긴자 2쵸메라면 1958년의 모습과 2008년의 모습이 같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동일지점을 촬영한 사진들의 시간상 변화의 정도가 경이적인 것은 둘째치고 1958년에서 1963년까지의 동경의 풍경사진들은 동시대 서울의 모습들을 찍은 것과 확연한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 더 경악스럽다.

긴자, 신주쿠 등의 중심지는 1958년에 촬영한 사진이라도 1960년대 말의 서울을 연상하게 하는 인파와 차량의 흐름과 건물의 외관을 보여주지만, 조금이라도 외곽으로 나가면 1958년의 동경이나 서울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런데 40년의 시간의 흐름속에서 서울과 동경은 전체적으로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다.

아마도 일본식민지배의 문화적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되어 우리네 문화적 감성이 아무런 제약없이 살아나게 된 것도 있을 것이고, 근대화의 정도가 식민지와 본국간에 상당한 격차가 존재했을 수도 있을 수 있다.


한 권의 사진집이 의외로 상당히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주고 있다.


사족 둘 :

내가 상기의 사진집을 본 곳은 중국 길림성 정부 소재지인 장춘시 도서관 5층에 자리잡은 "중일문화교류의 창"이라는 기관이다.
공간은 상당히 넓지만, 유치원마냥 아동스러운 좌석과 책상이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해서 정작 도서나 DVD등의 수는 적은 편이다.

중국인과 일본인은 우리와 일본인 만큼이나 감정이 좋지 않지만, 정작 일본들은 의외로 중일우호병원이나 문화교류의 기초거점들을 각 성정부 소재지에 하나씩 두고 있다. 그리고 중일우호병원은 그 성내에서는 상당한 고급의료기관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도 각 성급 지방정부 소재지에 중일문화교류의 창과 비슷한 한국문화소개기관을 개설하고 일본의 비슷한 기관의 소장자료들보다 훨씬 풍부하게 제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by deokbusin | 2009/11/03 14:55 | 잡담 | 트랙백 | 덧글(3)
미국해군 줌발트 급 구축함은 텀블홈 선체일까?

미국해군이 야심차게 건조를 추진하는 줌발트 급 구축함은 전파에 대한 저피탐지성 향상을 위해서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다.

즉, 홀수선의 폭이 상갑판의 폭보다 조금 넓은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는 전체적으로 선체에 경사를 주고 있는 디자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디자인은 19세기 후반기의 프랑스-러시아의 군함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디자인이며, 흔히 "텀블 홈"의 선체로 불리어진다.

그래서 줌발트 급은 가끔 텀블 홈의 부활이라고 불리워지기도 하는데, 내가 생각하기엔 줌발트 급의 선체는 텀블 홈이라고 단언하기가 곤란할 듯 싶다.

프랑스-러시아 군함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텀블 홈의 구조는 줌발트 급의 선체보다 훨씬 과격한 경사각을 주고 있다. 단면도로 보면 대충 상갑판의 폭이 홀수선보다 5분의 1가량 좁아 보이는 구조인 것이다.

그런데, 줌발트 급의 단면도를 가정하자면 전형적인 텀블 홈의 구조보다는 상갑판의 폭이 좀더 넓다. 오히려 19세기 후반기의 영국군함들에서 볼 수 있는 선체경사 각도와 구조에 가까운 편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한다.

B군님의 얼음집에는 19세기 말기에 영국에서 조달한 전함 미카사의 기념함 형태의 사진(http://mazrisharf.egloos.com/3352513)이 걸려져 있는데, 그것을 보시기 바란다. 미카사도 프랑스-러시아 군함 식의 대대적인 경사각을 주지는 않았지만 선체 그 자체에 어느 정도 경사가 주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B군님의 보충설명에 의하면 19세기의 조선기술의 경향상, 미카사 정도의 경사선체는 당연한 것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내가 보기에는 줌발트의 선체경사도나 미카사의 선체경사도는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상갑판이 홀수선 폭보다 약간 좁다고 해서 그것을 텀블 홈의 부활로 보는 것은 조금 지나친 것이 아닐까?


물론 설계자가 대놓고 "이 배는 텀블 홈 설계를 대대적으로 적용했다"고 공개발언을 했다면,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겠지만 말이다.

by deokbusin | 2009/11/03 12:28 | 잡담 | 트랙백 | 덧글(0)
전학삼 선생이 사망했다.
전학삼(錢學森. 1912-2009. 10.31)은 중화민국인으로 태어나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사망한 중국의 대표적인 항공우주공학자이다.

중국사에서 五代十國의 시기에 吳越왕국을 만든 錢謬의 후손으로서, 항주에 살던 몰락한 비단상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미국에서 로켓분야의 전문가로 박사위를 취득하고 1955년에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입국했다. 그 과정에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한 덕분에 괴악한 도시전설의 주인공-미국측이 전학삼의 머리 속에 든 지식의 공산권유출을 막기 위해서 5년간 백색의 감옥에 쳐박아 정신분열과 기억말소를 노렸는데, 정작 장본인은 5년내내 기억하는 것 모두를 암송해서 기억소실을 막았다는 괴담-이 되기도 하였다.

귀국 당시에 모택동과 주은래의 열렬한 환영과 적극적 지원약속을 받았고, 이는 문화혁명기간이라는 중국지성사 최악의 시기에서도 우주로켓의 개발에 하등의 지장을 받지 않게끔 하는 근거가 되었다.

문혁의 광풍 속에서도 로켓과 인공위성 개발에 성공한 결과 중국과학영웅으로서 존숭되었고, 중국과학계에서 막강한 발언력을 행사했다. 가령 1980년대 후반에 중국의학계에 몰아닥친 광범위한 기공연구는 전학삼이 기공이라는 것이 일단 치료성과를 내고 있는 이상 철저히 과학적으로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며 어느정도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과학계에서 유명인사로 통용되었던 三錢의 한 명이었고, 최근 노벨화학상을 받은 중국계 미국인도 전학삼의 비교적 가까운 친척뻘이었다고 전해진다.
by deokbusin | 2009/11/03 11:50 | 잡담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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