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보는 나의 인상(Image)
2월 말에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는 1939~40년의 겨울 전쟁과 같은 꼴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두 나라 간 국력의 차이가 워낙 컸던 데다가 우크라이나에게는 변변한 우방국 하나 없다시피했으니 완전히 당시의 핀란드 꼴이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좀 달라졌다.

중일전쟁이라는 인상을 받고 있다. 1894~95년의 청일전쟁이 아니라 1937~45년의 중일전쟁 말이다. 일각에서는 제이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라고까지 말해지는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중국에 대해서 군사력에 있어서 매우 현대적이고 강력한 입장에 있었다. 일본이 중국보다 못한 것은 인구-당시 일본 인구는 8천만 명, 중국 인구는 5억 명에 육박-와, 훨씬 뒤인 2000년대에나 알려지지만 전체 GDP에서 중국보다 모자란 정도였다는 것 뿐이고, 그나마 중국이 앞서 있었다는 경제력조차 중국정부의 약한 행정력으로 인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1936년 현재 중국 중앙정부가 실질적으로 확보한 세수는 강소성과 절강성에서 나오는 것이 전부라고까지 야유가 나왔겠나?


그런데, 전쟁의 경과는 어떠했는가? 특히 1937년에서 41년 말까지의 기간 동안 말이다.

전쟁 기간 거의 대부분을 일본은 공세로 시종하였으며, 만주국을 제외한 중국 영토의 상당한 부분- 실질적으로는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된 지역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심지어 그럴 듯한 괴뢰 정권까지 만들어 냈다. 

반대로 중국은 부분적으로 반격을 할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세로 일관하였다. 

단지 중국은 1937~39년 사이에 상실한 영토를 유의미하게 회복하지는 못하였지만, 일본군의 공세에 대해서 추가적인 영토 상실을 막아낼 수는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일본군은 평시에 그토록 총력전을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1938년부터 중국에서의 소모전이 확정되었을 때는 인적 자원의 총동원을 주저한 흔적이 보인다. 대학생과 도시민 징병은 똑똑하고 도시물 먹은 남자는 부려먹기 힘들고 야전생활을 못견딘다고 가능한 한 징병을 늦추고 있었고, 그나마 농촌 출신들조차 평시징병률을 10%에서 야금야금 올리는 방식으로 신병징집을 늘리고, 제대병사들을 즉시 현지소집하는 편법으로 동원하는 방법으로 충원하는 형편이었다. 

오죽하면 병사가 모자르다고 식민지 조선에서 지원병을 모집하여 만 명 이상의 지원자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식민지인들을 믿을 수 없다고 입영에 성공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황당한 일까지 있을 정도이다. 일본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총동원에 들어간 것은 미국과의 전쟁에 들어간 이후부터이다. 

반대로 중국은 전쟁 초반부터 말 그대로 총동원이었다. 심지어 농촌경제가 국가경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에서도 농촌을 경영하는 남성인구들을 수많은 원성에도 불구하고 가차없이 징병하였고, 대학생 이상 지식청년들도 1944년 병력이 붕괴된 이후에는 징병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까지는 그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중국과 일본은 1937년부터 41년 말까지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일본측에서 나오는 표현은 일화사변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이 중국과의 분쟁을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 제한전으로 조기에 종결지으려는 의도와 아울러 국제법상 전쟁이 성립되기 위한 전제조건인 선전포고를 회피함으로써 국제무역상에서의 각종 규제를 받지 않기 위해서 였으며, 중국도 암묵적으로 동의하면서 전쟁이되 법률적으로는 전쟁이 아닌 상황이 되었다.


물론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좀 달라질 것이지만, 전체적인 인상, 이미지는 그렇다.




그런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 양상이 중일전쟁 초반부의 그것과 비슷한 이미지이지 않는가? 



러시아가 대체로 공세로 나서고 우크라이나는 수세에 몰려 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측 원조로 받은 무기들을 가지고 반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공세가 둔화는 되었을 지언정, 돈좌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전쟁에 관한 국제법을 어기는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살해도 일본군이나 러시아군이나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인적자원의 동원에 있어서 러시아는 이바쇼프 상장이나 스트렐코프 등의 강경파들이 주장처럼 총동원령에 의한 대도시 청년들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중소도시와 지방의 가난한 청년들을 자원받아서 충원하는 방식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심지어 전쟁 초반기에 참전한 병력이 고갈된 현 상황에서도 지원병들을 늘리기만 하지 총동원법에 의한 징병 발동을 하고 있지 않다. 우크라이나가 징병령을 발동하지는 않고 있지만 그래도 예비역들을 총동원하여 70만 명을 채운 것과 비교하면 러시아의 인적 동원은 총동원이 아니라 고식적으로 신병을 늘리는 꼼수를 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심지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전쟁이 아니라 특수군사작전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문명사적 입장도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전쟁에 관한 국제법에 규정되는 각종 규제들을 회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기존에 받는 제재외의 추가적인 제재를 받지 않기 위해서 전쟁이 아니라 특별한 군사행동임을 주장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물론 눈가리고 아웅하는 이런 행위는 당연히 깨졌고, 가만히 전쟁 선언을 했으면 받았을 제재 이상의 불필요한 제재들까지 받아야만 하는 중이다.


이쯤되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중일전쟁과 비슷한 인상이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게다가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정부 전복이 목표라고 했는데, 이는 기존 정부는 완전 무시한다, 그러니 대화는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며 전쟁에 대한 협상 통로를 막아버린다. 이것도 일본측이 중국 상대로 중일전쟁 초반에 한 전적이 있었고, 그 바람에 중국정부의 태도과 경화되면서 결국 괴뢰정권 성립이라는 뻘짓까지 하게 된다.


덤으로 푸틴이 전쟁을 멈추고 서유럽이 전쟁을 멈추고 싶어도, 장개석이 그랬던 것처럼 젤렌스키도 전쟁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아무리 보아도 이번 러우 전쟁은 중일전쟁과 정말 매우 비슷하다.
by deokbusin | 2022/08/01 16:58 | 잡담 | 트랙백 | 덧글(9)
아베 신조 사망
먼저, 아베의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1. 사실 넘겨 짚는 것이지만, 아베가 살해당함으로써 자민당은 참의원 선거에서 단독 과반수를 넘어 참의원 개헌선까지 확보할 수도 있게 되었다.

1979년 오히라 마사요시 수상이 중의원과 참의원 동시선거 운동 도중에 급사하면서 그때까지 백중세이던 선거 분위기가 일거에 자민당에게 기울어져 버렸다. 그 결과는 양원 동시 단독 과반수였고.

심지어 선거분위기가 백중세가 된 원인이 자민당 내부분열로 인한 내각 불신임 통과였던지라, 오히라의 사망은 말 그대로 천우신조였다.

그런데, 이번 선거도 사실상 자민당 단독 과반이 되냐 마냐인 분위기였는데, 아베가 싫다는 사람에 의해 아베가 살해당하면서 부동층, 무당파, 무투표 층들이 모두 자민당 지지로 돌아가게 될 게 뻔해졌다.

이쯤되면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는 당연하고 단독으로 개헌선을 넘기는 것도 가능해 보인다.

참으로 자민당 후보들은 겉으로는 아베의 죽음을 애도하고 분노하겠지만, 뒤로는 웃음을 참느라고 고생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2. 아베 살해의 일차적인 수혜자는 누구일까?

나는 과감하게 기시다 후미오 수상과 현 내각 그리고 자민당을 들고 싶다.

아베는 장기집권을 하는 동안 자민당 내에서 자신의 파벌세력을 최대최강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는 자민당 내부 정치에서 아베 파벌의 눈치를 타 파벌들이 보게 만드는 정도를 넘어 다른 파벌 내부 행사까지 간섭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힘의 투사가 당내 정치가 아닌 내각과 의회에서의 정치력 행사까지 미치게 되면 제도상 최고 권력자와 실질적 최고 권력자로 정치권이 분열될 수도 있다.

일본 중세사는 바로 제도상 권력과 실질적 권력이 분리, 분열된 시대이기도 했지만, 가까운 1970~80년대 자민당도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바로 다나카 가쿠에이에 의한 자민당 농락의 시대로 다나카가 최대 파벌을 인솔하면서 당내 정치를 농락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다나카는 공식적으로는 자민당을 탈당한 상황이었다니, 일본언론이 다나카에게 야미쇼군이라는 별명을 지어줄 만도 했다.

그나마 다나카는 비공개적인 당내 조정에 집중이라도 했다. 그런데 아베는 어떠했는가?
당내 정치만이 아니라 내각 고유의 정치행사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조언"들을 공개적으로 했다.

아베 입장에서야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 헌법개정을 위해서 내각이 좀더 열심히 뛰어달라는 답답함으로 나오는 발언이겠지만, 그 말을 듣는 당사자인 내각 입장에서는 뒷방에 가야할 늙은이가 힘자랑하는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특히나 총리인 기시다에게는 더더욱.

아베 바로 후임자인 스가 요시히데야 아베 잔여 임기만 채우라고 파벌들이 땜빵으로 내세운 수상이고, 스가가 수상 근무 연장 의사를 보이자마자 파벌들이 단합하여 끌어내리기는 했다(사실, 일본 현지에서는 스가 재임중 성립된 행정상 조치들이 장기집권한 아베의 그것들보다 의외로 좋았다는 평판이 나오면서 스가 집권연장이 무산된 것이 아쉽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했었다).

그런데, 건강 문제로 수상직에서 물러난 아베가 건강을 회복하면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에 나섰는데, 이런 행태는 수상 퇴임후 은퇴하거나 원로 및 상담자 역할에 머문 역대 일본 총리들에게서는 보기 힘들었던 형태였다. 즉, 기시다와 현 내각 및 타 파벌들 입장에서는 아베가 자기들 영역에 비집고 들어가겠다는 의미로 보였을 것이다. 그것도 최대 파벌의 힘으로 말이다.

즉, 기시다의 일차 자민당 총재 임기가 끝나는 시기가 되면 아베가 다시 총재,총리직에 도전할 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자민당 내부에 돌고 있었을 것이 아베 살해 이전 자민당 사정이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베가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면서 자민당 내부의 불안감은 해소되었다.

그리고 이래저래 간섭하는 실력자가 사라진 기시다 총리는 비로소 자신의 의지대로 일본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by deokbusin | 2022/07/09 14:29 | 잡담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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