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한국 무역통제 발표의 이면
http://cv63.egloos.com/m/4431173

키티호크님이 말씀하신 내용들은 보수 우파계에서 꽤 알려진 내용들이지만, 첫번째 추신과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지금 일본이 한국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https://gendai.ismedia.jp/articles/-/65259

오하라는 문재인 통치의 한국을 준공산주의국가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강담사 계열 주간현대가 일본 주간지들 중에서 좌파 성향으로 분류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즉, 일본 좌파들조차 한국은 공산화 직전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대중 상대의 잡지에서 노출되었으며, 일본이 발표한 한국에 대한 무역 통제는 결국 한국 사법계의 판단에 대한 불만 표출보다 한국 그 자체가 좌파정권에 의해 일본 안보에 대한 극적인 위협으로 변질되는 것에 대한 공포가 우선했다고 보여진다.

일본 관방의 발표를 보아도 판결에 대한 불만을 단일하게 암시하기 보다는 다른 목적이 더욱 컸음을 암시하는 표현을 쓰고 있다. 요컨대 판결보다 다른 사정이 있다는 것인데, 다들 판결에만 주목하니 일본의 노력은 성과 없음으로 끝날 것이다.
by deokbusin | 2019/07/01 20:36 | 잡담 | 트랙백 | 덧글(4)
전태일에게 다른 길은 없었나?


다른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해서 스스로 분신하였던 전태일은 40대 이상에서는 거의 모두가 한두 번 정도는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전기인 <전태일 평전>을 완독한 사람은 1980년대의 운동권에서도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운동권 선배들의 의식화 작업에 끌려 다니면서도 그 의식화를 거부하는데 성공한 나의 경험상, 운동권 선배나 동기들이 소장하던 책 중에서 <전태일 평전>이 있었던 경우는 정말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태일의 행적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굳이 평전을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수는 있다.




그런데, 전태일의 행적은 진실로 당연한 것이었을까?


월간조선에 기고한 류석춘의 전태일 평전 비판은 전태일의 행적이 실은 당연한 것은 아니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먼저, 전태일은 16살이 되던 해에 청계천 평화시장에 자리 잡은 재봉공장에 '시다'로 취직한지 3년 만에 '재봉사'가 되었다. 당시 재봉사(1만 5천원)와 시다(1500원) 사이의 봉급 격차는 10배에 달했으므로, 전태일은 단 3년 만에 봉재 업계의 기능공으로서는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재봉사가 된 지 3년 후에는 월급으로 2만 3천원을 받았다. 이 월급액을 모은 연봉은 당시 한국 일인당 국내총생산을 3배 이상 넘는 금액이다. 이런 수입의 변화를 볼 때, 전태일은 상승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류석춘은 평전이 만들어낸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라는 것이 없었다"던 세간의 통념과는 달리, 실제로는 전태일 주변에 대학생들이 다수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들이 공유하고 있던 이념은 매우 급진적인 혁명 이데올로기였다. 그것도 기층현장 외부에서 침투한 운동가가 현장에서 급진적 운동을 일으킬 리더를 양성한 다음에 운동이 일어나면 외부의 간여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서 바로 현장에서 이탈하해야 한다는 앨린스키의 이론으로 무장한 운동권이었다.

요컨대, 전태일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던 시기에 전태일 주변에는 평화시장 외부에서 침투한 급진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운동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기에, 재봉사로 승진하여 고액의 봉급을 받게 되는 평전의 전반부 서술이 매우 상세한 반면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드는 평전 후반부의 묘사는 불분명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류석춘은 설명한다. 외부의 간여와 조력이 있었다는 사실을 은폐하려다 보니 서술이 모호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류석춘은 전태일과 비슷한 시기에 전태일과 극히 유사한 조건을 가지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여 사업가가 되어 성공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다. 류석춘이 노동부와 한국산업인력공단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기능한국인 수기집>에서 뽑은 금형전문가 서영범 씨의 가정사정은 전태일과 유사하다. 게다가 전태일과 동일하게 3년 안으로 단순 견습공에서 선반기사로 올라가 고액 봉급을 받게 되는 것도 비슷하다. 그러나 전태일과 유사한 부분은 여기까지다. 서영범 씨는 노동운동에 가담하지 않고 계속 소액으로나마 자산을 축적하고 직무역량을 키운 끝에 30대에 독립된 사업체를 창업했고, 그 사업체는 2008년 기준으로 20억 원의 연간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장은 한국의 주력산업인 중화학 공업과는 완전히 다른 의류봉재업이 주류이므로 사정이 다르다고 반론할 수 있다. 그럼, 이런 소문은 어떤가?

평화시장에서 현재 활동중인 사업체의 경영자들은 50~60년대부터 사업을 지속하고 그 사업을 상속받은 사람들은 드물고, 오히려 50~60년대에 밑바닥부터 시작한 기능공들이 대부분이라는 소문 말이다. 평화시장에서 의류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벤츠를 끌고 다닌다는 소문은 웃어 넘길 수도 있지만, 문재인 집권 이후에 공영방송의 공중파를 타고 방영된 사연 중에는 80년대 말인가 90년대 초에 생활보호를 받는 집안 출신으로 고교 졸업후 동대문 의류 시장에 운반업자의 보조로 취업해서 IMF시기에는 몰락도 겪었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독립된 의류운반점포를 운영하면서 방 3개를 가진 빌라도 소유하는 소상인을 소개하는 에피소드까지 나오는 것으로 짐작하건대, 60년대의 재봉관련 기능공들이 현재 평화시장의 의류관련 사업체 소유자로 변신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전태일에게도 그의 강한 상승 욕구로 볼 때, 그의 동료들처럼 '세속적으로' 성공할 여지는 충분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가 외부 운동권 선동자들의 선동을 접한 이후 다른 노동자들이 권익을 찾겠다면서 스스로의 역량을 깎아 먹는 동안, 전태일과 비슷한 시기에 평화시장에 들어온 기능공들은 외부의 선동대로 움직이지 않고, 작지만 유형무형의 자산을 축적한 후에 독립하여 사업자로 나갔고,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기업가로 성공할 수 있었고, 일부는 점포의 주인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반대로 외부의 선동에 놀아나 자신의 역량을 소모한 전태일에게 남은 것은 사회에 대한 불만과 자신에 대한 좌절이었고, 그 귀결은 분신 자살이라는 비극이었다.

덤으로, 전태일을 선동하고 죽음을 방조한 선동자들은 현장을 분쟁지로 어지럽히고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양 유유히 빠져 나와서는 그들이 가진 대학 인맥을 이용하여 지속적으로 운동권의 지도자급 세력으로 남았고, 1987년 이후에 세속적으로 출세해서 권력도 잡아 보고 부유함도 누렸다.


참으로 불평등한 세상이 아닌가.
by deokbusin | 2019/06/23 22:25 | 망상폭주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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