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내각제하에서 비정당인사가 내각총리를 차지할 때-1930년대 일본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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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이나 저 글에 달린 덧글에서도 충분히 언급되는 것입니다만, 의원내각제 하에서 성립된 거국내각에 정당출신 인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언제든지 내각해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정당출신 인사를 테크노크라트 출신 총리 휘하의 내각에 넣는다고 하여 안정적으로 정치가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1930년대 일본의 "중간내각"과 "거국일치내각"이었습니다.

 

의회 다수당이던 정우회 대표이자 총리이던 이누가이 츠요시가 군인에게 암살당한 후, 당시 일본에서 수상추천권을 가진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는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은)군부의 정당정치에 대한 혐오가 암살사건을 불렀다고 생각하여 차기 수상은 정당의 대표가 아니라 테크노크라트 출신으로 추천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고노에 후미마로는 사이온지에게 "지금은 정당출신에게 힘을 실어주는 강력한 정당내각을 만들어 주던가 아니면 정당정치를 혐오하는 군인들에게 내각구성원 일체를 떠맡겨서 그럼 네가 한번 해봐라-단 성과를 못내면 가만 안둬- 하든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사이온지는 이를 무시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이토-오카다-히로타-하야시 "중립내각"이 성립되었습니다. 이들 모두 테크노크라트의 정점에 올라선 해군대장과 고급관료 및 육군대장으로서 수상에 취임했습니다만, 정치력은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도 그런게 내각에 참여한 육해군의 군정계 장교들 모두가 틈만 나면 자군의 이익확대를 위해서 수상의 지도력을 훼손하는데 여념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내각에 참여한 정당출신 의원들조차 수상의 의도에 제대로 협조를 하지 않았지요. 심지어 마지막 중간내각의 총리이던 하야시 센쥬로는 현역 육군대장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정당출신 의원들의 실질적 거부에 밀려서 허수아비 노릇조차 못한다는 육군내부의 평판까지 얻었습니다.

 

결국 "중간내각"으로는 일본을 이끌어 나갈 수가 없다고 판단한 사이온지는 국민다수와 군대의 기대를 모으고 있던 "청년귀족" 고노에 후미마로를 수상직에 임명하도록 천황에게 주청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자신이 중간내각을 만들려고 할 때 대놓고 반대한 자세에서 의회정치의 복구를 기대할 수 있겠다는 사이온지의 희망도 있었겠지요.

 

헌데, 이 고노에 후미마로는 율령제 일본에서 메이지 일본의 정치체제의 내각총리대신에 해당하는 관백직을 차지할 수 있는 집안중 제일 격이 높다는 후광을 무기로 삼아서 일본정계의 기대주로 지냈습니다만, 정작 자신이 평소에 주장하던 귀족원 개혁에 대해서는 제대로 손을 못써보고 유야무야하는 방치상태로 놔두는 우유부단한 성격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1937년에 벌어진 중일간의 무력충돌을 차단할 수 있는 얼마 안되는 기회마저 날려버리고 밑도 끝도 없는 중국과의 전쟁으로 일본을 몰아갑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고노에 후미마로가 3차에 걸친 조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는 일본의회 구성원들의 협조아닌 협조가 있었습니다. 고노에가 첫번째 조각을 할 당시, "정당의 지혜를 내각의 정책에 반영한다"는 취지로 중간내각 시기에서는 "부패한 정당의 영향력을 배제한다"는 취지로 폐지한 성청정무차관보에 해당하는 각 성청의 참여관 직위를 부활시킨 것입니다. 이 자리는 대신과 사무/정무차관에 뒤이은 각 성청의 제3인자 자리였고 정당내각 시기동안에는 장래의 대신감들이 정무차관 이전에 거쳐가는 직위였기 때문에  상당히 인기가 많았던 자리였습니다. 고노에는 이 직위의 부활을 이용하여 일본의회내에서 대신급 거물정치인 외에 3선~5선 정도의 중견의원들을 포섭함으로써 적어도 국민의 지지도가 안정적일 동안에는 의회의 딴지를 크게 걱정하지 않을 만큼 권력과 내각을 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령 그동안 고노에에 대해서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오키 신지로(전후 과기청 장관)는 정계입문의 절친한 동기이자 군대의 이의를 염려하여 외무로 가지 않고 체신참여관으로 임용된 이누가이 다케루의 대타로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외무참여관에 취임하여 대중국 화평(?)공작에 참가하게 됩니다. 같은 입문동기에 열심히 연줄을 찾아서 운동했슴에도 불구하고 참여관 자리를 얻지 못한 오오노 반보쿠가 오키에게 투정을 부린 것은 야담이지만 말입니다.)

 

이처럼 의원내각제 하에서 테크노크라트 출신이 수상이 되어 내각을 운영하게 될 경우 대체로 정당중심 정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을 토대로 삼아서 성립되기 때문에 정치의 주역인 자신들인데도 불구하고 활동무대를 빼앗긴 정당의 반발은 필연적으로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니 테크노크라트 출신의 수상에게는 그러한 반발을 통제할 수 있는 리더쉽 혹은 보스맨쉽이 필요하며, 하다 못해 의회내 중견급 의원들을 유혹할 수 있는 뭔가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30년대의 일본 "중간내각"의 총리들은 이것을 보이지 못해서 무기력한 운영을 하다가 단명하였고, 고노에는 정책상의 우유부단함에도 불구하고 의회내 구성원들의 협조를 어떻게든 얻어낼 수 있었기에 비교적 길게 총리직을 잡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대통령중심제의 대통령이나 의원내각제의 총리 모두 정치가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뭔가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성공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by deokbusin | 2011/11/21 14:40 | 잡담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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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sonnet at 2011/11/21 18:40
잘 말씀해주신 대로 정치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을 '움직일' 기술이나 자원이 필요하죠. 내각제의 수상이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리처드 노이스타트가 이 점에 대해서 잘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맡은 부서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하고, 지지자로 하여금 지지할만하다고 여기게 만들어야 하며, 그 결과로 영향을 입을 사람들이 참을만하다고 느끼게 만들어야 한다. 이처럼 지지와 용인을 확보하려면 시점의 선택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이처럼 대통령의 권력을 결정하는 요인들은 곧 정부정책이 끝까지 실행될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요인들과 흡사한 것이다." http://sonnet.egloos.com/3241455
Commented by deokbusin at 2011/11/22 05:39
동의합니다.
Commented by Real at 2011/11/21 23:18
결과적으로 기반이 없기 때문에 카리스마와 같은 비젼이 사라진다면 쉽게 흔들린다는 말씀인가요?
Commented by deokbusin at 2011/11/22 05:39
그렇다고 보시는 것이 옳을 겁니다. 이회창만 해도 정계입문 초기에는 법원관료의 정점을 찍은 테크노크라트와 청렴이라는 카리스마가 있었지만 당내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김영삼 대통령에게 토사구팽 당했었고, 고건도 테크노크라트로서 대단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역시 당내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대통령 후보조차 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이회창과 고건의 진로가 달라진 것은 위기에 직면했을 때 아직 남은 평판으로 정치적 기반을 얼마나 재빨리 만들어 냈는가 정도의 차이입니다. 이회창은 이걸 성공시켜서 정치적 거물로 승승장구 했지만 고건은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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