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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자격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최초 참배한 우익 정치가로 한국의 20~30대는 알지 모르지만, 나와 같은 50이상에게는 한국 방문시 최초로 한국말로 연설한 일본수상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것은 나카소네가 패전후 샌프란시스코 조약 성립까지 일본이 독립국이 아니었던 시기를 체험했기 때문에 아래에 서술하는 행적의 바탕이 되는 성격과 결합하여 과거사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아니었을까?
사실, 나카소네를 단순한 일본의 우익 정객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할 당시에 내무성 소속 면접관에게 내무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대놓고 외쳤고, 가쿠후쿠 전쟁 당시에는 자신의 파벌을 우대해준 사토 에이사쿠의 뜻과 달리 다나카 지지를 표명하기도 한 반골 기질도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일까, 그 어렵다던 국철 해체를 필두로 하는 행정개혁도 달성한 행동파 정치인이기도 했다.
게다가, 관료 출신인데도 권력에 대한 미련이 많다 못해 질퍽거린다는 악평이 따라 붙는 전후 관료파 정객들과 달리 정세에 따라 변화무쌍한다고 해서 풍향계라는 별명을 정치 초년생 시기에 듣기까지 했다.
요컨대, 나카소네는 비교적 성공한 보수우익 정치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사망으로 이제 일본의 지도자급 현역 인사들 중에서 처참하기까지 했던 일본의 전시 및 전후 점령기 행각을 체험한, 그래서 인접국의 고통에 대해서도 그런대로 전향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던 인사는 사라졌다.
그리고 그 처참한 시기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쇼와 30년 이후 세대가 일본의 지도층으로 확고히 굳혀진다. 이제 한일관계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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