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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尙書>죽간 발견을 계기로 풀어보는 중국고대문헌 관련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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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에서 문자가 발명된 후에 종이가 등장하기까지 문자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도구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죽간, 목간, 비단 등이다. 그 중에서도 일상 공문서용으로 다용된 것이 바로 목간과 죽간이다. 당장 값이 싸니까.

2. 그런데 죽간이나 목간이라고 해도 붓으로 기입하기에는 좀 불편한 구석이 없지는 않은 데다, 무엇보다도 보관의 편리성이 너무 좋지 않다. 그 부피를 생각만 해도 기가 막힐 듯.

그래서 어떤 전설이나 시가, 주장을 타인에게 교육시킬 때에는 문서보다도 구전에 의존하게 된다. 선진 제자 문헌의 상당수가 은유적 경향이 강한 것과 아울러 상당히 단문이 많은 것은 표의문자라는 특성과 함께 구전의 편리성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今文尙書>가 복생의 구전으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고, <노자>가 리듬감 있는 은유적 단문이 된 것이다.

3. <상서>의 금고문 논쟁은 ssn688님이 상세히 설명하셨으니 그것을 보시면 되겠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

20세기 초에 <古史辨>이라는 책이 나온다. 이 책은 내가 확인한 바로는 총 6권까지 나온바, 그 책의 편집을 주관한 고힐강의 주장은 한 마디로 말해서 중국고대사의 전면적 부정이다. 특히 삼황오제와 하/은 시대를 전면 부정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시대적 배경에는 청대 중기에 등장한 근대적 문헌비평학인 고증학의 등장으로 인해 고전 및 그 고전에 대한 주자학적 주석에 대한 비판이 왕성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세기말에 본격적으로 망신살을 당하는 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결합된다.

즉, 옛 선배들의 훌륭한 문헌고증의 성과와 전면적으로 서구화를 하지 않으면 중국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결합하여, 전통적으로 이상적인 시대라고 칭송되었던 삼황오제와 하은주 시대를 전면부정하는 것으로 서구화 주장의 정신적 기반을 다질려고 했던 것이다.

3-1. 그런데 고힐강 등의 전면적인 중국전통과 고대사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19세기 말부터 나오는 갑골문의 출처를 추적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고고학의 성과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그들의 주장에 금이 가기 시작하여 본격화 되는 1950년대 이후로는 삼황오제까지는 몰라도 은주시대는 거의 옛 고문헌에 기재된 내용이 맞아 떨어진다고 인정되었다. 특히나 청대 중기 염약거에 의해서 위진 시대의 인물인 매색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입증된 위<고문상서>의 일부가 고고학적 기록과 유사하게 되자, 문헌고증의 성과조차 빛이 바래지게 되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재확인한 결과, 제가 매우 지나친 과장을 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ssn688님의 설명에 의하면 고고학 발굴의 결과로 출토된 고문헌으로 인해 기존의 경학해석이나 문헌비평의 결과가 뒤집히는 일이 나오는 이상, 위작으로 판정된 고문상서에 대해서도 진위여부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해야 할 것 같다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과장되게 해석하여 포스팅을 한 것 같습니다.

읽으신 분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하게 되어서 대단히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3-2. 그 바람에 하왕조-어차피 문자기록의 출토가 없어서 그렇지 은왕조 전시대에 해당하는 고고학적 유적은 상당한 규모의 국가적 조직을 암시하고 있다-는 물론 삼황오제조차 현실적 역사로 인정하자는 속칭 <탐원공정>이 추진되는 것이다.

그 모두가 중국의 국제적 위상 추락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무리하게 자국전통을 부정해서라도 서구화를 통해서 중국의 위력을 회복하자는 발상이 원인이지만 말이다.

4. 1950년대 이후의 중국 고고학의 성과는 문헌학에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라고 한다면, 아주 심각하게 전통적인 관점을 뒤집었다고 말할 수 있다.

4-1. <황제내경>은 중국전통의학에서 <상한잡병론>-다시 <상한론>과 <금궤요략>으로 구분되지만-과 맞먹는, 아니 그 이상의 권위를 가지는 의학이론서이다. 전통적인 입장은 삼황오제 시대에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었는데, 이것이 뒤집어진 것은 호남성 장사 인근에서 발굴된 전한 문제시기에 매장된 마왕퇴 한묘에서 출토되는 죽목간본과 백서본 의서들에 의해서이다. 즉 출토된 의서들을 분석한 결과 황제내경중 침구이론을 다루는 <영추>의 직접적인 원형으로 보아도 무방한 편들이 있음이 밝혀진 것이다.

4-2. <노자>의 경우는 <한비자>에 의해서 최초로 해석되는데, <한비자>에는 현행 <노자>와는 달리 덕경이 도경보다 먼저 나온다. 이로 인해서 왕필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데 1970년대 고분발굴의 결과 전한 시기까지의 <노자>문헌은 덕경이 먼저 나오고 도경이 나중에 배치되는 것으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문장의 경우는 왕필이 편집한 텍스트가 아니라 당왕조의 부혁이 편집한 텍스트의 문장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고 해서 왕필의 업적이 고문헌의 훼손이라는 이유만으로 부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왕필의 문헌정리 및 주해가 없었다면 <노자>의 영향력은 아마 지금의 그것보다 상당히 약해졌을 것을 가능성이 꽤 있기 때문이다. 아니 노장철학 자체의 영향력이 감소되었을 수 조차 있다. 그만큼 왕필의 <노자>정리는 현재의 노장철학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다.)

4-3. <손빈병법>의 경우 문헌자체가 1970년대까지는 실물이 존재하지 않았던 탓에, 문헌의 실재성은 고사하고 손빈의 존재조차 의심받았던 때조차 있었던 모양이다(심지어는 손자의 실재성조차 의심된 적이 있었던 모양이니). 그런데 이게 1970년대에 산동성 고분에서 <손빈병법>과 <손자>가 발굴되면서 <손빈병법>의 실재에 대한 인정은 물론 손빈과 손자의 관계에 대해서 사마천의 기록을 인정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4-4. 이렇게 무덤에서 책들이 튀어나오면서 기존의 고문헌에 대한 주장들이 뒤집어지자, 덩달아 빛을 보게 된 문헌이 있으니 그것은 <주례>이다. 원래 <주례>는 전한 말의 유흠이 위조해낸 것이라는 게 정설인데, 이렇게 고분출토 문헌에서 기존의 설이 뒤집어지는 사태가 <상서>를 시작으로 여러 번 계속되자 드디어 중국학계 내부에서는 "유흠이 위작한 것은 맞긴 한데, 적어도 무에서 위작한 것이 아니라 어떤 古禮를 근거로 유흠의 주장을 삽입해서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으로 변하게 되었다(김용옥).

지금 중국에서 고대의 관제를 논하는 문헌에는 반드시 <주례>가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런 사정의 반영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당장 <중국의학사>교과서만 해고 <주례>에서 인용된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5. 고분 출토 고문헌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5-1. 전목은 20세기를 풍미한 역사가인데, 이 사람이 <장자찬전>을 지은 후 장자에 푹 빠져서 <노자>는 장자 뒤에 나온 것이고, <대학>과 <중용>도 장자의 영향을 받아서 뒤에 나온 것 운운 했다가 서복관의 정밀한 공격을 받고선 자기의 주장을 철회한 일이 있다.

그런데 서복관이 죽고나자 바로 그 철회를 취소했다던데, 아마 상당히 비웃음을 샀을 듯 싶다. 교수님에서 그 이야기를 듣자 학생들 모두가 웃는 걸 참느라고 고생했으니까.

5-2. 왕필의 <노자>재편집에 맞먹는 고전재편집 작업에 도전한 사람이 있는데, 그게 바로 주자이다. 주자가 <예기>에서 대학과 중용을 빼낸 일은 유명하지만, 그 중에서도 대학에 대해선 "이 상태로는 성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학에 기재된 문장의 차례를 뒤바꾸고, 그걸로도 모자라 자기 나름대로 탈락한 부분이 있다고 추정하여 그 탈락한 부분을 자기가 창작하기까지 하였다. 이게 그 유명한 <대학장구>이다.

수 백년 뒤, 왕양명에 의해서 주자의 작업이 논박당하면서 꽤 시끄러워지게 되었는데, 이 때 왕양명이 내세운 것이 바로 <고본대학>이다. 즉 <예기>에 있는 원본 그대로를 끌어내다 단행본으로 만든 것인데, 덕분에 대학은 세 가지 판본이 존재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학자의 재간일까 아니면 학자의 고집일까.



어쨌든 중국의 무덤이나 땅 속에서는 대체 어떤 문헌이 튀어나올 지 알 수가 없다. 문헌이 아닌 유물만으로도 기존의 연구가 수년 단위로 뒤집어지는게 중국 고고학이다 보니 재미있기까지 한데, 기왕이면 <상한잡병론>의 원형이나 <신농본초경>의 원형이 튀어나와 주었으면 더더욱 재미있겠다.

덧글

  • 비밀글 2008/10/31 11:58 답글

    비공개 덧글입니다
  • 환영합니다.^^ deokbusin 2008/10/31 19:47

  • 페스츄리 2008/10/31 13:13 답글

    아..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중국고문헌학과 고고학에서 엄청난 변화가 있었군요!! 저도 위고문상서(동진의 매삭이 위조했다는..)가 고고학적 증거와 유사하다는 이야기는 충격입니다.
  • 위고문상서와 고고학적 증거의 유사성 운운은 나중에 확인했더니 제가 지나치게 과장된 표현을 썼던 것 같습니다. 정확히는 고고학 발굴로 인해서 등장하는 고문헌들로 인해서 전통적인 경학해석이나 문헌비평이 뒤집어 지는 일이 나타나는 이상 고문상서 전체를 위작으로 마냥 몰아대는 것은 유보하고 보아야 된다는 것이 ssn688님의 견해이십니다.

    페스츄리님에게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 같아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deokbusin 2008/10/31 19:52

  • 페스츄리 2008/10/31 13:15 답글

    금문상서와 고문상서..(공자의 집 벽에서 나왔다는 책들이죠. 한대와 위나라 영가지란을 거치면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금문가의 주장에 밀려서 별 권위를 행사하지도 못했다고 하는데..) 그리고 위고문상서..아..복잡하네요. 실제로 금고문 논쟁은 저도 개략적으로밖엔 잘 몰라서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번동아제 2008/10/31 18:21 답글

    우리라라도 신라 6부의 성립사를 놓고 문헌사학계에서 수십년 동안 논쟁하던 것들이 봉평비와 냉수리비의 발견으로 일거에 게임오버, 판갈이된 사례가 있죠. 금석문이 나와도 쇼킹한데 연대가 더 올라가는 고판본의 책이 무덤 속에서 나온다면야 그야말로 재미있겠죠.
  • 김용옥이 "한국 무덤에선 왜 책이 안 나오냐?"고 불평한 적도 있습니다.^^ deokbusin 2008/10/31 19:56

  • 국내 토질이 산성이라 무덤에서 책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종이재질은 산성 토질 아니라도 이집트나 돈황 같은 기후가 아닌 담에야 보존이 될리도 없죠. 간혹 백제목간이 나오긴 했지만 삼국시대만 해도 종이가 광범위하게 쓰인 시대라 목간으로 만들어진 서적이 얼마나 있었을지 의문 입니다.

    첫 방문 입니다만,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 노자의 경우는 '곽점초간' 때문에 엄청난 논쟁의 회오리가 한바탕 불었었죠. '곽점초간' 노자의 경우는 지금 도덕경과는 내용이 상당히 달랐고, 직접적인 반유가 성향의 문장이 없어서 제법 논란이 됐던 것으로 압니다. 요즘은 또 어떻게 정리되었을지 궁금하네요.
    umberto, 2008/11/04 23:36 삭제

  • 페스츄리 2008/10/31 20:47 답글

    상한잡병론은 한대 장중경이라는 분이 쓰신 거지요? 제가 잘 몰라서 그냥 물어봅니다. 신농본초경도 이름은 참 유명한 책인데..정확한 저자가 누구시지요? 워낙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의학고전들이어서 저도 이름은 외우고 있습니다.
  • deokbusin 2008/10/31 21:02 답글

    상한잡병론은 저자가 장중경인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신농본초경은 정확한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 소하 2008/11/02 12:47 답글

    저는 <사기>와 <한서>의 원자료였던 <한기거주>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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